< 위대함과 비속함의 사이 어딘가 >
2022.10.21
유승희
유승희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 주지 않고 인간이 얼마나 짐승 같은지를 지나치게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비속함 없이 그의 위대함을 지나치게 보여 주는 것도 위험하다.
이 두 사항을 모른 채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그러나 이 두면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이롭다.”1)
그리고 비속함 없이 그의 위대함을 지나치게 보여 주는 것도 위험하다.
이 두 사항을 모른 채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그러나 이 두면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이롭다.”1)
최근 일론 머스크(Elon Musk,1971-)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공개했다. 행사에서 그는 우수한 성능을 가진 옵티머스를 개발하고 이를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화하는데 힘쓰겠다고 했다. 이제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을 닮은 수준을 넘어 인간의 일상을 함께하는 제2의 인간이 되려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금의 상황과 달리 일본 로봇 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森政弘,1927-)는 그의 <불쾌한 골짜기 (Uncanny Valley /부키미노타니; 不気味の谷 )> 가설을 통해 인간과 기계와의 안전거리를 제안한 바있다. 로봇이 인간과 닮을수록 호감도가 상승하다가 로봇이 인간을 너무 닮으면 외려 시체나 좀비를 보는 듯한 섬뜩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 구간이 그래프에서 보이는 첫 정점에서 곡선이 하락하면서 생기는 골짜기이다.

출처: wikipedia
따라서 모리는 섬뜩한 골짜기에 빠지지 않도록 인간과 기계 간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라며 그 방안으로 비인간적인 디자인을 제안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옵티머스처럼 현재는 모리가 불쾌한 골짜기를 연구했을 당시인 1970년대와 상황이 다르다. 20세기엔 로봇 공학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계는 인간이 될 수 없다.’의 입장을 취했지만 21세기의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과 외모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사고하는 방식도 매우 흡사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에 익숙해진 대중의 반응 또한 긍정적이다. 대체로 휴머노이드 로봇을 보면 스칼렛 요한슨과 같은 백인 연예인들을 모델로 하며, 한국의 가상모델 루시나 로지만 봐도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외모을 갖고 있다. 이렇듯 지금 시대에선 인간이냐 로봇이냐의 사실보다 개체가 가진 외관의 호감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미 기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지금, 인간에게 로봇은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개체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질적인 개체로서 불쾌감을 유발하는 로봇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와 그것이 익숙해져 버려 동질적인 개체로 여겨지고 있는 시대의 차이로 인해 모리의 불쾌한 골짜기의 가설은 지금 현재에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 우위에 서있다는 점에 대해서 불쾌한 골짜기의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불쾌한 골짜기를 통해 원래 인간이 로봇에게 느꼈던 불쾌감이 더 이상 현재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포착할 수 있고 여기서 현재의 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전통적인 관계를 벗어나 오히려 전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로봇이 인간의 형상과 많이 닮았다고 느낄 때 드는 불쾌한 감정은 익숙해져서 사라졌지만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느끼는 지점들에 대해선 여전히 두려움과 거부감 그리고 불쾌감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에서 모리의 불쾌한 골짜기는 동시대에 유의미하다. 더 나아가 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전복됨은 기술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고 기술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강제성이 수반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기술의 강제적 수용은 기술을 억지로 따르게 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의 소외가 생기기 마련이다. 가상 이미지로 소통하는 미디어 체계가 그 시대에 관심을 많이 받은( ‘좋아요’가 많은) 이상적인 형상에 편향되는 극단적 획일성을 갖게 되는 것이 지금 말한 어떠한 형태의 소외일 것이다. 로봇 전문가 크리스토프 바트넥(Christoph Bartneck)은 “로봇 디자이너들은 세계 각국에서 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흰 로봇을 이상화 한다”고 지적했다. 기술의 발전은 정말 무수한 다양성을 가져다줬지만 바트넥의 지적처럼 이 다양성이 과연 진정 다양한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이처럼 본인은 동시대의 과학 기술을 접하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는 반면에 인간의 비속한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비속한 모습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에 가려진 무지함과 무력감을 발견한다. 파스칼은 위대함과 비속함이라는 대립된 개념을 통해 모순적인 인간의 삶이 어떻게 해야지 인간에게 이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를 알기 위해선 양극에 치달아 있는 모순들을 들여다볼 때 그 사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한 상황들이 지속된다면 양극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시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재 인간은 기술의 발전으로 자율주행, 배달 어플, 카카오 택시 등 극한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가 하면 마약을 밀수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마약 운반책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뱃속에 마약을 가득 채워 마약 운반하는 ‘보디 패커’들은 살짝 움직이기라도 하면 터져 죽을 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다. 그들에게 자신의 몸은 어떤 의미이며,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이기에 자신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게임 캐릭터 대하듯 대하는가. 그저 한 공간을 차지하는 덩어리에 불과하는가. 과학 기술에서 비롯된 물질주의, 유물론적 사고는 인간의 의미를 사물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물질로 취급하게 만든다. 그리고 물질주의는 미디어 속 가상세계에서 시각적인 것으로 극단화된다.
1) 블레즈 파스칼, 『팡세』, 을유문화사, 현미애, 2013, 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