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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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샤 폴레 Sascha Pohle
페터 바이벨 Peter Weibel
김윤신 Kim Yunshin
>
                                                                                                                           

2023.04.26
유승희
   




3개의 전시를 하루에 보면서 동시대가 다원화의 시대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종로구, 마포구, 관악구를 방문하며 세명의 개인전을 하루에 관람한 일과는 서울이라는 지역에서 했던 활동에 불가하지 않는다. 이 지극히 일상스러운 일과 속에는 동시대의 융복합적, 다공적, 전지구적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스페인, 암스테르담, 한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 국가들은 3명의 작가가 활동한 곳을 나열한 것이다. 동시대는 더 이상 하나에 담을 수 없는 시대가 되버렸다. 다원화의 사전적 의미인 ‘사물을 형성하는 근원이 많아짐’과 같이 개인의 근원은 다양해졌다.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이자면. 그리도 가고 싶었던 구겐하임을 방문한 당시에 마침 좋아하는 작가의 서적이 있어서 바로 구매했었다. 그 책을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온 뉴욕의 구겐하임에서 사서 그런지 더 특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쿠팡에 떡하니 있었다. 이 짧은 순간에 마치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를 얻었다는 특별한 기쁨에서 한 순간에 실망감까지 극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과거에는 너무나도 특별했을 순간들이 이젠 동시대인에게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었구나.하는 좋으면서도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 전시 이야기로 돌아가, 오늘 전시를 보는 동안  페터 바이벨(Peter Weibel), 사샤 폴레 (Sascha Pohle), 김윤신 (Kim Yunshin)의 이토록 다양한 생각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지금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이 다양성을 편식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 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1903-1969)는  『계몽의 변증법』 에서 신화적인 자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수단이 었던 계몽이 또다시 신화와 야만으로 퇴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계몽을 통해 인류는 최초의 야만상태인 자연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문명화되면서 생긴 전체주의라는 또 다른 야만상태에 다시 예속 되었다는 것이다. 노골적인 독재적 방식이든 아니면 세련된 민주적 통제 방식이든 간에, 전체주의적 메커니즘 속에서 개인들은 이성적이고 자율적 인 주체로 정립되지 못하고 다시금 지배와 폭력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체주의적 경향은 오늘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문화에서도 드러나는 현상이다. 특히 젊은 사람이 가장 많았던 국립현대미술관 <페터 바이벨> 전시에서 감상하는 사람들이 작품 앞에 서서 감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긴한데, 뒤에선 옆에선 사진을 연신 찍어주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서 #페터 바이벨을 치면 작품과 함께 찍은 사람들의 사진들이 넘쳐난다. 페터 바이벨의 전시는 그의 작품에 담긴 사유의 내용보단 스크린 안에 담겨지는 자신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건진 전시로 기억에 남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관찰을 관찰하기: 불확실성> 작품에서 원을 그리며 설치된 카메라들 가운데 서면 관객이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담기는데, 그 위치에서 관객은 아무리 움직여봐도 자신이 원하는 부분은 보지 못하고 스크린 속에 담긴 모습만 볼 수 있다. 페터 바이벨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관점과 지각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본인은 작품 속에 서서 꼼짝없이 모니터에 비춰진 모습만 보고 있는 관객의 모습을 통해 반대로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지각 능력이 기계에 의해서 제한됨을 느꼈다. 심지어는 그 모니터의 담긴 자신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기술의 세력에 의해 자유를 오히려 억압받고 있는 오늘날의 전체주의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기술을 몽매주의적으로 수용하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전시였다.
 




<페터 바이벨: 인지행위로서의 예술> 전시전경,  <관찰을 관찰하기: 불확실성> 작품 앞에서 그 모습을 사진 찍는 관람객
                                                                                                                                                          출처: Google 이미지









<사샤 폴레 개인전: 플루이드 그라운드(Fluid Ground)> 전시전경, 본인 촬영.




위의 사진에서 보이듯이 사샤 폴레는 일상의 사물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작가이다. 유리, 편직물, 망사 가방, 인천 해안에서 수집한 스티로폼 부표 등의 일상의 사물에서 사회적, 역사적 의미의 흔적을 가지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내국인과 외국인,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등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오가며 삶에 스며들어 있는 의미들과 마주하게 한다. 독일을 거쳐 서울,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샤 폴레는 반복되는 이주와 체류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수용과 배제에 대해 아래 사진  <Regardless of Nationality> 작품에서 담아낸다. <Passage>에서는 부드러운 편직물에 세월에 의해 울퉁불퉁한 도시 지면을 짰다. 그리고 도시들이 표현된 편직물을 펼치고 겹치는 퍼포먼스를 한다. 전시 제목 <Fluid Ground> 처럼 동시대는 유동적인 표면을 가졌지만 여전히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있는 불편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견고하게 계획되어 완벽히 만들어진 도시가 세월에 의해 손상될 수 밖에 없듯이 동시대가 완전히 유동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사샤 폴레와 같은 작가처럼 이러한 현실에 반응하여 오히려 무심코 혹은 무감각하게 지나갔던 것들에 대해 들여다보는 계기가 생기고 더 나아가 잠시 멈춰서 비판적 사고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완전히 유동적이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이 구겐하임 에피소드에서 느꼈던 ‘좋지만 씁쓸한’ 감정이 들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다공예술>1)의 ‘공존-공감’부분을 참고하자면 현대미술에서는 인간의 관계에 대한 참여 형태를 오랫동안 미학적으로 ‘공감’과 ‘공존’을 동시대화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예술은 공존하기 위한 수단이자 인간에게는 공존과 공감의 의미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네트워크 이론가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이 ‘진보할수록’ 우리와 사물의 ‘직접적 접촉은 사라져간다’는 세간의 통념과는 반대로 우리와 사물의 관계는..훨씬 더 긴밀”해졌다.2)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무서울 정도로 빠른 기술의 발전이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해 더 심도있는 성찰을 제공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Regardless of Nationality>, 본인 촬영.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작업하는 사샤 폴레와 달리 김윤신은 50년 가까이 목조각에 주력해왔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더하고 나누며, 하나>는 다양하고 자극적인 동시대의 작품에선 느끼기 어려운 순수하고 단단한 깊음을 느낄 수 있는 전시였다. 김윤신의 작품에는 한가지 매체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끈질김 뿐만 아니라 그녀만의 철학인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이 일관되게 담겨 있다. 김윤신은 우주만물이 생성과 소명을 반복한다는 음양사상의 원리를 가져와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목조각으로 표현한다.  




 
<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 >, 본인 촬영.


김윤신은 예술이 공간예술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의 통나무 사이, 사이에 공간을 내며 조각을 한다. 신기하게도 공간이 생기면서 하나의 조각이 여러 조각으로 나눠지지만 그 공간에 의해서 다시 연결된다. 김윤신은 작업을 시작할 때 오랫동안 나무를 응시한다고 한다. 자신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자신이 되어야지 작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모니터를 응시하는 시간이 더 많은 동시대에선 김윤신이 하는 ‘나무 응시’가 낯선 행위일지 모른다. 아직 태어난지 22개월도 채 안된 조카가 현란한 영상에 빠져있는 있는 모습처럼.      

 



나무를 응시하는 것, 나무와 하나가 되어 작업하는 삶. 50년 가까이 단단한 나무와 하나 됨을 자처한 김윤신은 그녀의 단일한 철학이 무한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인간 지각의 한계에 대해 다룬 피터 바이벨 전시를 관람한 후 봤어서 더욱 김윤신 작품에 담긴 단일의 가치가 더 와닿았다. 피터 바이벨 작품에 달린 센서나 카메라를 통해 인식되어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비춰지지만 그 스크린에선 본인을 느끼기 어렵다. 분산적으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윤신 작품은 가만히 그 자리에 놓여 멈춰 있지만 그 상태에서 김윤신의 손길이 생동감있게 고스란히 느껴지고  합쳐졌다, 나눠졌다하는 듯한 형태 그리고 뒷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살과 같이 공간과 함께 상호적으로 관계를 맺는 등 새로운 상상들을 유발한다. 작가 인터뷰 영상에서 김윤신은 관람객들에게 각자만의 감상으로 자신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자신이 되는 것처럼 작품과 하나가 되어 감상하길 권한다.    




작가 인터뷰 영상, 본인 촬영.
 




작품과 하나 되기 전에 찍은 작품과 나의 모습, 본인 촬영.




3명의 전시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자, 기술과 인간 사이에 걸터 있는 자, 기술과는 거리가 먼 자의 관점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어느 입장이 옳고 그른지의 기준은 없지만 각기 다른 세명의 관점을 고려해보면서 자기 자신에게 맞는 취향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 추려가며 어렴풋이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개인의 취향은 별개로 동시대의 다원화, 다공성, 융복합성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도르노는 긍정과 부정이 있는 그대로 각자 존재하며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되는 총체성의 예술이 아닌 복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병존’ 이 가능할 때 진정한 예술이 된다고 했다. 그냥 남들이 다 하기에,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휩쓸려서 하는 인정과 존중은 온전하지 않으므로 아도르노가 말하는 병존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진정한 예술이란 진정으로 복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되기에 동시대에서 다원화의 의미가 변질되지 않으려면 새롭거나 관심 없는 것에는 더욱 주목해야 하고 익숙하거나 심취한 것에선 멀어질 필요가 있다.    







1) 강수미, 『다공예술:한국 현대미술의 수행적 의사소통 구조와 소셜네트워킹』, 글항아리, 2017, p.73
2)  Bruno Latour,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이세진, 사월의 책, 2012,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