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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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악의가 크게 다가올 때 가까워지는 순수함 >
                                                                                                                           

2023.11.23
유승희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마히토’는 하나의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자신의 조상 큰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화에 휩싸여 생긴 상처 자국에 자신의 악의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런 상처 즉 악의가 있는 자신이 결코 큰할아버지의 세상을 대를 이어 다스릴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보통 자신의 악한 마음을 숨기려 한다. 자신도 차마 보이고 싶지 않아서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마히토는 세상을 다스려볼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힘을 물려받을 수 있는 순간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악의를 고백한다. 고백하는 이 장면은 마히토의 순수함이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백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큰할아버지는 여전히 권한다. 큰할아버지의 결정에 있어 자신의 악의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마히토의 순수함이 선택의 첫 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마히토 머리에 생긴 상처는 그의 억울함과 분함이 담긴 자해의 흔적이다. 어린 나이의 소년이 겪기엔 혼란스러웠던 환경이 마히토에게 방황의 시간을 가져다줬다. 그 방황의 표출이 마히토 머리에 난 상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마히토 상처에 담긴 악의를 온전히 악함으로 보기엔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영화의 초반 즉 마히토가 방황하던 시기에, 그는 세상과 단절하길 바라고 자기 폐쇄적인 일상을 보낸다. 이때 마히토는 자신의 자기 폐쇄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 안에 찰랑거리는 악을 담고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 중반에 일어나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탐험을 통해 마히토는 웃음도 되찾고 용서도 하게 되며 안정을 찾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악의에 대해 고백하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게 된다. 이 글의 제목처럼 < 자신의 악의가 크게 다가올 때 가까워지는 순수함>, 마히토의 순수함은 자신의 악의를 인지할 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악의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수면 위에 올라온다. 다시 말해 진리란 죽음에 가까이 있으며 순수함을 토대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마히토가 탐험하게 된 세상은 저승이다. 생물을 잡지 못하는 죽은 영혼, 죽은 영혼을 위해 대신 생물을 잡아서 먹이를 주는 젊은 시절의 키리코, 이승에 태어나기 전 상태인 ‘와라와라’, 이승에서 죽은 엄마와 사라진 이모. 마히토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의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순수한 사랑과 용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특히 저승의 세계에서 경험하게 된 다양한 죽음들 가운데 마히토가 엄마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모를 죽음의 장소에서 맞닥뜨린 경험은 이모의 순수한 사랑과 희생을 깨닫게 해줘 이모를 엄마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히토의 여정은 죽음에 대한 고찰이었다. 마히토는 여행을 통해 사라지고 잊히는 죽음의 속성을 직면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며 성숙해진다. 죽음을 깊이 마주할 때 우리는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성찰은 자신의 악의를 보게 하여 겸손을 낳고 겸손은 모든 것을 어린 시절 처음 본 것처럼 대하게 만든다. 이렇듯 자신의 악의에 대한 성찰은 순수함으로 이끌어 준다. 존경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작품을 볼 때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긍정의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대상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순수하게 바라본 그의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연약하거나 투박해 보이는 선과 터치로 그려진 대상은 그 대상의 에너지가 담겨진 실제성을 지니고 있어서 가벼움 안에 고요하고 깊은 울림을 가져다준다. 마찬가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도 동심을 일깨워주는 아기자기하고 순수한 그림체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을 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의 작품에 존재하는 순수함이 갖는 이중적 요소가 순수함의 존재 방식이 아닐까. 가벼워 보이지만 고귀한 무언가로 무게감 있게 존재하는 순수함.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순수함을 간직하기란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 하지만 그러한 현대이기에 더욱더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순수함이 갖는 ‘꾸밈없음’ 즉 진실성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때문이다. 온갖 변형과 섞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고 있는 현대에서 온전함을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