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어른의 시작 >
2025.09.11
유승희
유승희
우리가 살면서 ‘참 어른’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존재는 어른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어른을 만나지만, ‘참 어른’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참’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나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을 뜻한다. 이를 빌려 정의하자면 참 어른이란 사실이나 이치를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조금도’라는 강조이다. 단순히 어긋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 수준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자기 검열과 겸손이 요구될까. 그렇기에 참된 어른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결혼 후 아기를 원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이 참된 어른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흥미롭게도 사전에서 ‘어른’의 세 번째 의미는 ‘결혼을 한 사람’으로 제시된다. 물론 어른됨의 기준을 결혼의 여부로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정 부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결혼이라는 엄청난 화합의 과정은 어른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어느 한쪽이 짓눌림 없이 온전히 존재하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일, 더 나아가 아이의 탄생을 통해 또 다른 하나 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결혼은 일종의 성숙을 향한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숙이 ‘연단(鍊鍛)’의 시간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정은 이러한 연단의 시간을 제공하는 장이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자 ‘참 어른’이라는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마틸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틸다>는 총명한 아이가 진정한 가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미성숙한 어른과 성숙한 아이를 대조함으로써, 어른의 역할을 성찰하고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논의할 의의가 있다.
영화의 서두에 갓 태어난 마틸다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모든 아동이 최초로 마주하는 존재가 부모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어른됨’, 더 나아가 ‘참된 어른됨’의 출발점이 부모의 역할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영화 속 마틸다의 부모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를 통해 부모의 역할이 결여될 때 어른됨이 훼손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교장 트런치불 역시 교육 기관의 권위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돌봄과 양육의 차원을 상실한 채 권위주의적 통제만을 행사하며 미성숙한 어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녀의 거대한 체격와 군복을 연상시키는 제복은 성인의 위엄을 과장하는 시도로써 유아의 어른 흉내내기에 가까워 보인다. 이처럼 영화 속 부모와 교장의 인물상은 다소 과장된 묘사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면을 통해 가려진 어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의 인물을 통해 어른의 감춰진 모습을 과장하여 가시화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간과하거나 정상화해온 어른의 권위와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담임교사 허니는 부모만큼이나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녀는 마틸다를 입양하여 부모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이는 부모의 역할이 단순히 생물학적 출산이나 혈연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사랑을 통해 수행될 수 있는 사회적, 윤리적 역할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허니는 ‘심리적 부모’ 혹은 ‘윤리적 양육자’의 개념을 구현하며, 참된 어른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참된 어른됨은 단순히 부모의 책임과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니가 보여준 것처럼, 가정과 사회에서 타인을 품고 돌볼 줄 아는 윤리적 태도를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참 어른은 혈연이나 제도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과 사랑을 넘어서는 포괄적 윤리성을 구현하는 주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과 부모 됨을 통해 형성되는 사랑의 마음은 참 어른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어른 됨이 단순히 생물학적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며 습득되는 책임과 사랑의 태도를 통해 실현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살면서 만나기 어려운 참된 어른은 실제 삶 속에서 이러한 실천을 통해 발현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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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아기를 원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이 참된 어른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흥미롭게도 사전에서 ‘어른’의 세 번째 의미는 ‘결혼을 한 사람’으로 제시된다. 물론 어른됨의 기준을 결혼의 여부로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정 부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결혼이라는 엄청난 화합의 과정은 어른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어느 한쪽이 짓눌림 없이 온전히 존재하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지는 일, 더 나아가 아이의 탄생을 통해 또 다른 하나 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결혼은 일종의 성숙을 향한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숙이 ‘연단(鍊鍛)’의 시간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정은 이러한 연단의 시간을 제공하는 장이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자 ‘참 어른’이라는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마틸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틸다>는 총명한 아이가 진정한 가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미성숙한 어른과 성숙한 아이를 대조함으로써, 어른의 역할을 성찰하고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논의할 의의가 있다.
영화의 서두에 갓 태어난 마틸다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모든 아동이 최초로 마주하는 존재가 부모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어른됨’, 더 나아가 ‘참된 어른됨’의 출발점이 부모의 역할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영화 속 마틸다의 부모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를 통해 부모의 역할이 결여될 때 어른됨이 훼손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교장 트런치불 역시 교육 기관의 권위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돌봄과 양육의 차원을 상실한 채 권위주의적 통제만을 행사하며 미성숙한 어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녀의 거대한 체격와 군복을 연상시키는 제복은 성인의 위엄을 과장하는 시도로써 유아의 어른 흉내내기에 가까워 보인다. 이처럼 영화 속 부모와 교장의 인물상은 다소 과장된 묘사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면을 통해 가려진 어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의 인물을 통해 어른의 감춰진 모습을 과장하여 가시화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간과하거나 정상화해온 어른의 권위와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담임교사 허니는 부모만큼이나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녀는 마틸다를 입양하여 부모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이는 부모의 역할이 단순히 생물학적 출산이나 혈연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사랑을 통해 수행될 수 있는 사회적, 윤리적 역할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허니는 ‘심리적 부모’ 혹은 ‘윤리적 양육자’의 개념을 구현하며, 참된 어른됨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참된 어른됨은 단순히 부모의 책임과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니가 보여준 것처럼, 가정과 사회에서 타인을 품고 돌볼 줄 아는 윤리적 태도를 실천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참 어른은 혈연이나 제도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과 사랑을 넘어서는 포괄적 윤리성을 구현하는 주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과 부모 됨을 통해 형성되는 사랑의 마음은 참 어른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어른 됨이 단순히 생물학적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며 습득되는 책임과 사랑의 태도를 통해 실현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살면서 만나기 어려운 참된 어른은 실제 삶 속에서 이러한 실천을 통해 발현될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