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의 정의 >
2022.04.25
유승희
유승희
행복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침 조깅을 하던 중 문득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누구나 공감 가능한 행복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깅을 하면서 한강을 배경으로 푸르른 나무와 잔디가 펼쳐진 풍경을 보았고, 그 속에 누워 있을 나를 상상하며 행복함을 느꼈다. 누군가에겐 ‘으 지저분하다 혹은 벌레에 물릴 것 같아!’ 하고 달아나고 싶은 풍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마당의 잔디에서 물을 뿌리며 놀거나 잔디에 누워 햇볕을 쬘 때면 나를 온전한 자유함으로 채워주었던 안락한 기억이 있다. 뿐만 아니라 찌스(나의 반려견)가 파릇파릇 올라온 잔디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풀과 흙을 묻힐 때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대자로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다 건강해지는 상쾌한 기분이 든다. 이렇듯 누군가는 피하고 싶은 모습이 나에겐 행복으로 다가온다.
행복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느꼈던 만족과 기쁨에서 생성된다. 자신이 살면서 만족하며 흐믓해 하던 상태들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된다. 그리고 그 행복 가까이에 살기 위해 각자만의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행복뿐만 아니라 삶 속의 모든 것들을 개인의 기준에 맞춰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생각 이상으로 신뢰한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해진다. 한 번도 수영해 보지 않은 아이가 옆에 있는 아빠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기에 물에서 발차기를 하는 것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두려움을 잊게 해주는 신기한 마음 상태이다. 게다가 믿음은 인간의 덕목인 ‘더불어 사는’ 사랑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행복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정의 내려진다. 그 개인적 경험이 물론 타인과 관련 없이 완전한 개인성을 갖는 다곤 할 수 없겠지만 여기엔 본인의 해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또한 편협하지 않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화된 세계에서 유형의 신체를 가진 인간의 경우, 실체가 없는 것을 생각해 내고 느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험이 제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경험에 한해서 편협성을 띨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덕목인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믿음을 통해 인간의 편협성은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행복의 개념은 타자에 대한 믿음과 연결될 때 완전히 달라진다.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행복이 타인의 시선을 공유한 후엔 완전히 다른 스케일로 확장된다. 이를 경험하면 기존에 나의 행복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편협했는지 그리고 그 행복이 오히려 날 괴롭힌 건 아닌지 하고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극심해져 비혼주의나 딩크족 등으로 전개되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인형이나 나무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 중심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무분별한 존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이 줄어들고 편협해진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개인적인 행복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때 행복의 의미가 확장되고 더 나아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으며, 행복을 공유하는 것은 행복의 개인적인 정의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