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싸는 인간’ 프로젝트
“메타버스 시대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여태까지 예술작품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인 동시에 현실의 언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물로서 이중성을 가졌다.우리는 현실에서 한 사물로서 예술작품을 만나게 되지만, 예술작품은 그저 한 사물로서의 의미만 갖지 않는다. 예술작품은 일반 사물과 달리 예술작품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면서 동시에 그 예술작품 안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감상, 즉 내재적인 과정을 통해 현실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하게 해준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모순적인 이중성은 예술작품이 현실과 가상, 외부와 내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율성을 갖도록 해준다. 때로는 실제보다 더 정확하게 현실을 재현하는 현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나 유토피아가 되어 주기도 한다. 앞서 서술한 예술작품의 모순, 이중성, 자율성은 일반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작품이라는 사물 즉 ‘현실에서 시작되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관점에서 설명되었다. 물론 미술사에서 뉴미디어의 등장은 기존 예술보다 더 다양한 가상성을 가져다줬지만, 뉴미디어 아트의 가상성 역시 물질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뉴미디어 작품 대부분이 갤러리에서 소개되고 감상 되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계속 ‘현실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여겨져 왔다. 그런데 지금의 NFT 아트에서 그러한 관점은 유효하지 않다. 가상세계의 NFT 아트는 현실이 아닌 가상에서 생성되며, 그 작품에 대한 내재적 과정도 가상에서 이뤄지고 더 나아가 가상에서 거래되고 소유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가상 안에서 운영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 속 인간에게 기발하고 솔깃하며 환상적인 요소로 다가오기에 이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동시에 이러한 가상세계에서 현실의 의미는 희미해진다. 현실의 의미가 희미해짐은 예술작품의 자율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은 현실과 가상, 외부와 내부를 넘나드는 내재적인 과정에서 예술의 자율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율성으로부터 예술작품의 존재가치가 생겨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본인은 가상세계에 대한 몽매주의적 수용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이 매개되는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보존하고, 이에 대한 실천의 하나로 본인 계정의 NFT 작품을 통해 현실 속 흔적을 가상세계에 가져옴으로써 ‘메타버스 시대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늘 현실과는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간들은 열려있는 상태를 지향한다. 여기서 열려있는 상태란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 집단의 통제나 규제로 중앙집권화된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에 대한 반발로 블록체인 기술이 만들어졌고, 더 자유롭고 제약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메타버스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현실로부터 시작되며 현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현실과 가상(유토피아), 삶과 죽음,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부자와 가난, 기쁨과 슬픔 등의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혼재되어있는 수많은 선택에 놓여있기 때문에 자율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똥싸는 인간>, 2022, 디지털 드로잉, 28×21cm

<이제 곧 그 사람은 복도에 걸린 초상화가 되겠죠>, 2022, 디지털 드로잉, 28×21cm

<신령한 갓난아기>, 2022, 디지털 드로잉, 28×21cm

<바보상자>, 2022, 디지털 드로잉, 29.6×2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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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의 구원>, 2022, 디지털 드로잉, 25×20cm

<흔들리는가?>, 2022, 디지털 드로잉, 25×25cm

<빗나감의 축복>, 2022, 디지털 드로잉, 35×30cm

<소멸>, 2022, 디지털 드로잉, 65×48cm * text 에서 <소별의 의미> 참고.

<누리호>, 2022, 디지털 드로잉, 65×48cm

<선의 무한한 가능성>, 2022, 디지털 드로잉, 60×40cm
* text 에서 <선의 무한한 가능성>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