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윗 홈

“평안과 자유가 보장된 공간으로의 집이 사라지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사치의 도구가 되고 정체 모호한 형상으로 정형화되었지만 아무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제 가혹하리만큼 낯선 집을 나와 친숙함과 따뜻함과 달콤함을 간직한 꿈결 같은 집으로 들어가자.” <작가 노트 중, 2019>
<스윗 홈>은 주거와 관련된 정책, 문화, 사업이 동시대에서 가장 핫한 이슈로 여겨지는 현실에 대해 과연 집이 주는 본연의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오늘날 집은 주거를 넘어 경제적 가치의 의미로 발전되어 자산의 척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재산으로서의 집은 현대사회에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하여 그로 인해 집이 주는 심연의 가치를 상실하게 하였다. 본인은 먹고, 씻고, 자고, 게으름 피우고, 고독을 즐기며 몽상에 잠기는 등 집이기에 가능한 행위에서 필수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집이 주는 본래의 가치들은 여전히 존재하긴 하지만 그 형태가 달라졌다. 삶의 순간들이 집약되어있는 내적 공간인 집은 재산이자 하나의 사치품으로 외부에서 그저 관찰되는 집이 되었다. 집의 내적 의미보단 집의 가격, 위치, 평수, 인테리어 등의 외적 조건들이 우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작업을 통해 상실된 집의 내적 의미에 대해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외적 조건으로서의 집의 의미가 부정될 수 없는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조약돌, 화병, 은박지, 삽, 쿠션 등의 사물과 화려한 패턴의 시트지나 술장식, 깃털과 같은 이질적인 재료들을 수집하고 우연성과 모순의 방식으로 재조합하여 친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형상으로 배치하였다. <스윗 홈>에는 천편일률적인 형상은 없다. 자유롭고 독특한 조합이 있으며 가볍고 무의미한 재료가 넘친다. 본인은 일상의 여러 가지 소재들을 혼합하여 직관과 우연성을 통해 조형언어를 구사한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듯한 다양한 재료들이 자유롭게 얽히고설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때 발견되는 사물들 사이의 이질적인 관계는 서로 관계 맺으며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한다. 질 들뢰즈(1925~1995)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자면, 들뢰즈는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 절대적인 차이 혹은 ‘차이 자체’를 지니면서 무한한 잠재성이 다양체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흔들리는 모양>은 나무 판에 조화가 고정되면서 이에 반응하여 생긴 그림자를 함께 그린 작품이다. 비어 있던 나무 판에 다른 사물이 얹어지면서 생긴 그림자라는 우연적 잠재성은 작품 형성의 원리이자 무한한 잠재성으로 이끌기 위한 조건이다. 이처럼 사물과 사물이 관계 맺으며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틈은 외부환경과 정신을 매개하며 서로의 차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킨다. 들뢰즈는 차이로 인해 갖게 되는 무한한 잠재성이 우리의 관습과 개념의 틀로부터 멀어질 때,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스윗 홈>의 복잡한 조합은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복잡하게 얽혀지는 개별적인 집의 내면성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사물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 하기보다는 감각을 느끼게끔 유도한다. 재료의 부조화를 통해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제한성을 무시한다. 이처럼 <스윗 홈>의 오브제들은 사물 간에 독특한 조합으로 일상적인 물리적 정의에서 벗어나 색다른 감각적 유희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무한한 잠재성이 생성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감상을 의도함은 자본주의적인 유용성의 원리에 의해 ‘재산’의 의미만 강조되는 집’이 아닌 모든 감정과 기억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집에 대해 상기시키기 위함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매체의 복잡한 상호연계는 공간에 배치되면서 더 극대화되고 동시에 그 의미 또한 확장된다.
작품은 이러한 차이로 인해 모호해지는데, 이 모호함은 공간에 배치됨에 따라 순간의 조형을 만들며 수많은 내밀한 이미지 조어를 만들어 낸다. 각 위치에 놓인 작품들은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의도적 애매한 조합’을 통해 낯설지만 친숙한 형태로 다가온다. 더 나아가 작품에 담긴 모호성은 잊히거나 소외되던 존재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현실에서 우위에 서 있는 관점이나 관습적 사유를 부정하므로 양가적 성격을 띤다.

<흔들 램프>, 2019, 철,천조각, 53×30×10cm

<꿈의 비논리적 성질>, 2019, 슬리퍼, 우레탄 비닐, 스티커, 빈백, 나무판자, 모피, 스펀지, 가변크기



<스윗 홈>의 전시 전경을 보면 각 개체가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다. 그래서 작품과 작품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 모호함은 곳곳에 자리한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도록 한다. 관람객은 이곳, 저곳에 위치한 오브제들 사이로 자유롭게 지나다니면서 작품 안에 참여하여 작품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다. 즉 관람객들은 연극적인 무대에 들어가서 연극의 구성원이 되어 연극을 체험하듯이, 좀 더 자율적인 상태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작품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위해 <꿈의 비논리적 성질>과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장치로 앉을 수 있는 쿠션을 배치하였다. 참여자가 벽이 쳐진 공간으로 들어와 쿠션에 앉을 때, 이는 마치 현실 세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착각을 유도한다. 그리고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시트지가 부착된 나무판자’와 ‘인조털 ’그리고 ‘동그라미가 그려진 판’의 위치는 다르지만 모두 벽에 기대어 있다. 여기서 참여자도 마찬가지로 쿠션에 기대어 앉게 된다. 작품과 유사한 형태와 구조로 작품을 바라보게 된 참여자는 사물과의 대립이 아닌 동일한 위치에서 서로 매듭지어진다. 이처럼 작품에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배치와 상황은 사물과 관람객 간의 유기적 맥락을 형성하고 새로운 의미들을 끊임없이 생성해나간다.
작업에서는 다양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이중적이면서 모순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면서 불일치와 분열을 반복한다. 그리곤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로 인해 생성되는 틈을 통해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사물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감상자의 주체적 자율성을 자극하여 찌꺼기의 존재를 다양한 관점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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